발렌틴 파블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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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렌틴 파블로프는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마지막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모스크바 재정 연구소를 졸업하고 재무부 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국가 물가 위원회 위원장, 재무부 장관을 거쳤다. 총리 재임 기간 중 1991년 소련 통화 개혁을 단행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에 가담하여 체포되었다. 석방 후 은행 이사, 학술 단체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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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틴 파블로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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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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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7년 9월 26일 |
출생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
사망일 | 2003년 3월 30일 (65세) |
사망지 | 러시아 모스크바 |
묻힌 곳 | 퍄트니츠코예 묘지 |
국적 | 소비에트 및 러시아 |
민족 | 러시아인 |
모국어 | 러시아어 |
학력 | |
출신 학교 | 모스크바 금융 대학교 |
경력 | |
소속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62–1991) |
소련 국가 가격 위원회 의장 | 임기 시작: 1986년 8월 15일 임기 종료: 1989년 6월 7일 |
재무 장관 | 임기 시작: 1989년 7월 17일 임기 종료: 1990년 12월 26일 |
소비에트 연방 총리 | 임기 시작: 1991년 1월 14일 임기 종료: 1991년 8월 28일 |
대통령 | 미하일 고르바초프 |
총리 대리 | 블라디미르 벨리치코 비탈리 도구지예프 |
서훈 | |
훈장 | 레닌 훈장 노동적기훈장 명예 휘장 훈장 |
2. 초기 생애와 경력
발렌틴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1958년 모스크바 재정 연구소를 졸업했다. 그는 정부 경제학자로서 노멘클라투라(관료) 경력을 시작했으며, 1959년 재정부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다.[2] 초기 경력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재정부에서도 근무했다.
1979년 파블로프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81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이사회의 일원이 되었다.[3] 그는 국가 계획 경제의 모든 측면을 감독하는 국가계획위원회 재정부의 장을 역임했다.[2] 1986년 1월부터 8월까지는 보리스 고스테프 장관의 재정부에서 제1차관을 역임했다.[3]
1986년 8월 15일, 파블로프는 국가 물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6월 7일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3] 1989년, 그는 니콜라이 르지코프 정부에서 고스테프의 뒤를 이어 재정부 장관이 되었다.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와 함께 파블로프는 르지코프의 제2정부에서 소련 최고회의에 의해 압도적으로 선출된 유일한 후보였다. 재정부 장관으로서 파블로프는 소련 경제의 시장화를 지지했으며, 소련 화폐 공급의 급증과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증가를 감독했다.
2. 1. 출생 및 학력
Валенти́н Па́влов|발렌틴 파블로프ru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1958년 모스크바 재정 연구소를 졸업했다. 그는 정부 경제학자로서 노멘클라투라(관료) 경력을 시작했으며, 1959년 재정부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다.[2]2. 2. 경제 관료 경력
발렌틴 파블로프는 1958년 모스크바 재정 연구소를 졸업하고, 정부 경제학자로서 노멘클라투라(관료) 경력을 시작했다. 1959년 재정부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다.[2] 초기 경력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재정부에서도 근무했다.1979년 파블로프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81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이사회의 일원이 되었다.[3] 그는 국가 계획 경제의 모든 측면을 감독하는 국가계획위원회 재정부의 장을 역임했다.[2] 1986년 1월부터 8월까지는 보리스 고스테프 장관의 재정부에서 제1차관을 역임했다.[3]
1986년 8월 15일, 파블로프는 국가 물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6월 7일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3] 이 기간 및 이후 재정부 장관으로서 파블로프는 각료평의회 의장 니콜라이 르지코프가 제시한 중앙 집중식 가격 개혁 제안을 지지했다. 1989년, 그는 르지코프 정부에서 고스테프의 뒤를 이어 재정부 장관이 되었는데, 그의 재임 기간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국가 물가 위원회 부위원장인 리라 로제노바가 파블로프가 지지하는 중앙 관리 가격 개혁 계획을 옹호했지만, 국가 위원회 위원장직에는 선출되지 않았다. 그는 르지코프 정부에서 각료평의회 의장단의 일원이기도 한 유일한 장관이었다.[4]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와 함께 파블로프는 르지코프의 제2정부에서 소련 최고회의에 의해 압도적으로 선출된 유일한 후보였다. 재정부 장관으로서 파블로프는 소련 경제의 시장화를 지지했으며, 소련 화폐 공급의 급증과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증가를 감독했다. 또한, 소련 암시장에서 루블과 미국 달러 간의 환율을 설정했다. 그는 1993년 재정부 장관과 이후 총리 재직 시 소련의 금 보유고에 대해 거짓말을 함으로써 여러 서방 은행과 채권자들을 속였다고 자랑스럽게 인정했다. 1989년, 파블로프는 미래의 소련 총리이자 러시아 SFSR 총리인 이반 실라예프의 실수와 누락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여 부총리로서의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실라예프는 파블로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파블로프가 소련 총리가 되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5]
2. 3. 국가 물가 위원회 위원장 및 재정부 장관
발렌틴 파블로프는 정부 경제학자이자 고스플란(Госплан) 금융 부문 책임자였으며, 1959년부터 소련 재무부(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СССР) 공무원으로 재직했다.[1] 1989년 소련 재무장관(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СССР)에 취임했고,[1] 1990년에는 정치국에 합류하여 니콜라이 루이시코프의 후임으로 소련 총리가 되었다.[1]3. 소련 총리
니콜라이 르지코프가 1990년 12월 심장마비로 사임한 후, 파블로프는 타협적인 후보로 새로운 총리직에 선출되었으며, 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6] 1991년 1월 14일 소련 최고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벨리치코와 비탈리 도구지예프 두 명의 제1부총리와 함께 찬성 279표, 반대 75표, 기권 66표로 승인 및 선출되었고, 장관 대다수에 대한 승인은 수 주 안에 이루어졌다.[7] 파블로프는 총리 취임 당시 보수주의자로 여겨졌으며,[7] 소련 언론은 그를 "대담하고 복잡한 인물"로 묘사하며 완전한 시장화에 반대하지만 소련이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억압적이라고 믿었다고 보도했다. 총리로서 그의 첫 조치 중 하나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소련 정부 – 장관회의 – 의 본부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국가건설위원회의 이전 본부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1959년부터 소련 재무부(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СССР) 공무원으로 재직하여 1989년에는 소련 재무장관(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СССР)에 취임했다. 1990년에는 정치국에 합류하여 니콜라이 르지코프의 후임으로 소련 총리가 되었다.
3. 1. 총리 선출 배경
니콜라이 르지코프가 1990년 12월 심장마비로 사임한 후, 파블로프는 타협적인 후보로 새로운 총리직에 선출되었다.[6] 소련 최고회의는 1991년 1월 14일 파블로프와 제1부총리인 블라디미르 벨리치코, 비탈리 도구지예프를 찬성 279표, 반대 75표, 기권 66표로 승인 및 선출하였다.[7] 파블로프는 총리 취임 당시 보수주의자로 여겨졌으며, 소련 언론은 그를 "대담하고 복잡한 인물"로 묘사하며 완전한 시장화에 반대하지만 소련이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억압적이라고 믿었다고 보도했다.3. 2. 취임 초기 활동
1990년 12월 니콜라이 르지코프가 심장마비로 사임한 후, 파블로프는 타협적인 후보로 새로운 총리직에 선출되었으며, 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6] 1991년 1월 14일 소련 최고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벨리치코와 비탈리 도구지예프 두 명의 제1부총리와 함께 찬성 279표, 반대 75표, 기권 66표로 승인 및 선출되었으며, 그의 장관 대다수에 대한 승인은 수 주 안에 이루어졌다.[7] 파블로프는 총리 취임 당시 보수주의자로 여겨졌으며, 소련 언론은 그를 "대담하고 복잡한 인물"로 묘사하며 완전한 시장화에 반대하지만 소련이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억압적이라고 믿었다고 보도했다. 총리로서 그의 첫 조치 중 하나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소련 정부 – 장관회의 – 의 본부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국가건설위원회의 이전 본부로 이전하는 것이었다.3. 3. 1991년 통화 개혁 (파블로프 개혁)
1991년 소련 통화 개혁은 흔히 파블로프 개혁으로 불리며, 소비에트 연방 해체 직전 마지막 통화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1991년 1월 22일에 시작되었는데, 불과 2주 전에 개혁이 없을 것이라고 연설한 것과는 반대되는 조치였다. 개혁의 주된 목적은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를 회수하여 소비재 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8] 파블로프는 해외에서 소련으로 유입되는 자금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긴다는 정부의 판단을 그 이유로 제시했다. 당시 소련 언론은 이를 조롱했지만, 3년 후 파블로프의 발언은 사실로 밝혀졌다.[8]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61년에 발행된 구권 지폐의 수령 및 교환을 중단하라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이 명령에는 1991년에 발행된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도 포함되었다. 1991년 1월 23일, 정부는 부패한 관리, 자본가, 범죄자들의 소득을 동결하기 위해 월별 은행 예금 인출 한도를 500루블로 제한했다.
파블로프의 지시에 따라, 정부는 1991년 1월 1일부로 가격의 40%를 자유화하고 5%의 판매세를 도입했다. 특히 소비재 가격은 생산자와 유통업자 간의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자유 가격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필립 한슨(Philip Hanson)의 저서 "소련 경제의 부흥과 몰락: 1945년 이후 소련 경제사"에 따르면, 파블로프 개혁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연방 공화국들은 파블로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광범위한 지역 독과점 기업들은 사치품에 대한 자체적인 기준을 적용하여 가격을 인상하는 경향을 보였다.
소련 시민들은 1991년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단 3일 동안만 기존의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를 신권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교환 기간은 연장될 수 있었지만, 정부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짧은 교환 기간 탓에 직장과 우체국에서도 환전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저축 은행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이 개혁으로 돈을 저축했지만, 신속하게 환전하지 못한 소련 시민들은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일부는 하룻밤 사이에 1.5만러시아 루블에서 3만러시아 루블에 달하는 금액을 잃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파블로프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부는 당초 목표했던 815억러시아 루블의 극히 일부인 140억러시아 루블만을 회수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했으며, 식량과 교통을 포함한 필수 품목의 가격은 100~300% 폭등했다. 소련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히 하락했고, 국가 예산 적자는 GNP의 20~3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개혁 이후 인플레이션은 매달 50%를 넘어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1991년 4월, 파블로프는 "반 위기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파업 금지, 소련 법률에 위배되는 공화국 법률의 효력 정지, 전력, 통신, 운송 산업에 대한 특별 관리 체제 도입, 중앙 정부에 대한 재정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공화국에 대한 처벌, 소규모 기업 및 서비스의 민영화 가속화, 국영 기업의 자율성 확대, 예산 삭감, 가격 자유화, 임금 통제 해제, 소비에트 루블 안정화, 농업 부문에 대한 새로운 자원 투입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 계획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3. 4. 권력 투쟁과 쿠데타 시도
1991년 6월, 총리직의 권한이 제한적이라고 느낀 파블로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자신을 총리직에서 해임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소련 최고회의에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으로 나타나[1], 최고회의에 대한 보고에서 소련 경제의 위태로운 상태를 대표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파블로프는 이를 소련 최고회의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회의 사이의 지속적인 법률 전쟁[2] 탓으로 돌렸으며, 소련 전역 또는 적어도 특정 경제 부문에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파블로프에 따르면, 고르바초프가 너무 많은 권력을 유지하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부족한 한, 소련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파블로프는 소련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와 장관회의로 권력 이양을 촉구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장관회의가 대통령의 승인 없이 경제 문제에 대한 법령을 발표할 권리, 자체적으로 법안을 제안할 권리, 사회 및 경제 정책 결정에 대한 더 큰 역할, 고스방크와 세무 감찰청에 대한 통제, 그리고 조직 범죄를 단속할 특별 권한을 갖기를 원했다. 심지어 이를 위한 5개 항의 결의안을 입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파블로프는 소유즈 의원내각의 지도자 빅토르 알크스니스로부터 이 아이디어에 대한 지지를 받았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투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소유즈의 여러 구성원들은 KGB와 국방부의 성명을 통해 이 제안에 대한 의견을 요구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알크스니스는 만약 파블로프가 그들과 미리 상의했더라면 이 결의안이 쿠데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4]
오후가 되자 소유즈 회원 대다수는 즉각적인 투표를 찬성했다. 소련 최고회의 의장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이미 헌법 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노보 오가료보로 떠났고,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투표에 대해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자리에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개혁가 이반 랍체프가 있었는데, 그는 루키야노프를 신뢰하지 않았고 KGB, 내무부 및 국방부의 성명을 요구함으로써 투표를 지연시키려 했다.[5] 랍체프에 따르면, 당시 분위기는 투표가 있었다면 파블로프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한다.[6] 당시 소련 비밀경찰과 군부는 소련 정부의 권위를 강화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파블로프의 계획을 지지했다.[7] 소유즈는 투표를 통해 장관회의의 권한을 강화하고, 장관회의에 입법 발의권을 부여했다.[8]
그 직후, 잭 F. 맷록 주니어 (주 소련 미국 대사)는 고르바초프에게 그에 대한 쿠데타 가능성을 알렸고,[9] 소련 지도자는 아나톨리 체르냐예프가 모스크바 외곽의 수수께끼 같은 군대 이동에 대해 알려주자 걱정하기 시작했다. 6월 21일, 파블로프의 연설 4일 후,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에 연설하여 자신과 파블로프 사이에 의견 차이가 없다고 대표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 때조차도 고르바초프의 체제 내 권력은 이미 약해지고 있었지만,[10] 그는 이전에 장관회의에 부여되었던 강화된 권한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11] 고르바초프와 파블로프 사이의 권력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고르바초프는 1991년 7월 29일 보리스 옐친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에게 신연방 조약의 서명과 비준 후 파블로프와 함께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가 해임될 것이며, 나자르바예프가 파블로프의 후임 총리로 임명될 것이라고 약속했다.[12]
파블로프는 소련 내 공화국으로의 권력 분산을 추진하는 고르바초프의 신연방 조약에 반대하여, 부통령 게나디 야나예프,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등 보수 강경파가 이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가담했다.
위원회는 1991년 8월 19일 고르바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데타 실패로 파블로프는 3일 후인 8월 22일에 총리직에서 해임되었고, 1주일 후인 8월 29일에 체포되었다.
3. 5. 1991년 8월 쿠데타 가담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과 보리스 옐친의 독립 러시아 추진으로 소련이 느리게 붕괴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연방 조약은 권력을 공화국으로 분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이미 불안정한 정부의 경제 장악력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었다. 파블로프는 1991년 8월 12일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에서 새로운 연방 조약 초안을 받았고, 8월 14일 '''모스크바 뉴스'''에 이를 게재했다.[9]조약에서 나타난 분권화 입장에 반대한 파블로프는 1991년 8월 비상사태 국가위원회 설립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위원회에 파블로프가 참여한 것은 고르바초프 이전의 정책으로 회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위원회의 주된 목표는 소련이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연방 국가로 계속 존속하도록 하는 것이었다.[9] 비상위원회는 게나디 야나예프(소련 부통령), 소련 부통령, 내무부 장관 보리스 푸고,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주도했으며,[9] 이들은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는 쿠데타 하루 전인 8월 18일 파블로프에게 쿠데타 계획을 알렸다. 그는 크류치코프의 요청으로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공모자들을 만났고, 8월 19일 그와 공모자들은 생방송으로 소련 국민에게 고르바초프가 건강이 좋지 않다고 발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블로프가 여러 모순된 명령을 내리고 말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가 술에 취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회고록에서 그는 전날 아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고 인정했다. 같은 날, 그의 공모자들은 파블로프를 축출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그의 다차로 보냈고, 그의 아내가 그를 돌보았다. 다른 가담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블로프는 쿠데타 실패 후 체포되었다.[2] 파블로프는 구금 중 고혈압으로 입원했다.[10] 그는 1993년 1월 출국 금지 약속으로 풀려났고,[11] 1994년 러시아 국가 두마의 사면을 받았다.[2]
4. 총리 이후의 삶
파블로프는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로 총리직에서 해임된 후 체포되었다가 1994년 사면받아 석방되었다. 석방 후, 여러 은행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자유경제학회(Free Economic Society)와 국제경영학회(International Academy of Management)의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경제 및 학술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쿠데타를 변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하기도 했다. 2003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여 피아트니츠코예 묘지(Pyatnitskoye Cemetery)에 매장되었다.[15][16]
4. 1. 체포 및 석방
파블로프는 1994년 5월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12] 이후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차스프롬뱅크(Chasprombank)의 이사를 역임했으나, 은행 이사회의 요청으로 사임했다. 이사회는 그에게 "무기한 휴가"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12] 1996년 2월, 파블로프가 사임한 직후 은행의 면허는 러시아중앙은행이 설정한 은행법 위반으로 취소되었다.[13] 그 후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프롬스트로이뱅크(Promstroybank (Russia))의 고문으로 일했고, 1998년에는 미국 기업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시스템즈(Business Management Systems)의 부사장이 되었다.[14] 자유경제학회(Free Economic Society)와 국제경영학회(International Academy of Management)의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국제경제학자연합(International Union of Economists)의 부서를 이끌기도 했다.
4. 2. 경제 활동
구금에서 풀려난 후, 파블로프는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차스프롬뱅크(Chasprombank)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은행 이사회의 요청에 따라 사임했는데, 이사회는 그에게 "무기한 휴가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12] 1996년 2월, 사임 직후 은행의 면허는 러시아중앙은행이 설정한 은행법 위반으로 취소되었다.[13] 그 후 파블로프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프롬스트로이뱅크(Promstroybank (Russia))의 고문으로 일했고, 1998년에는 미국 기업인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시스템즈(Business Management Systems)의 부사장이 되었다.[14] 그는 자유경제학회(Free Economic Society)와 국제경영학회(International Academy of Management)의 부사장으로 모두 일했고, 나중에는 국제경제학자연합(International Union of Economists)의 부서를 이끌었다.4. 3. 학술 및 사회 활동
구금에서 풀려난 후, 파블로프는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차스프롬뱅크(Chasprombank)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은행 이사회의 요청에 따라 사임했는데, 이사회는 그에게 "무기한 휴가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12] 1996년 2월, 사임 직후 은행의 면허는 러시아중앙은행이 설정한 은행법 위반으로 취소되었다.[13] 그 후 파블로프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프롬스트로이뱅크(Promstroybank (Russia))의 고문으로 일했고, 1998년에는 미국 기업인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시스템즈(Business Management Systems)의 부사장이 되었다.[14] 그는 자유경제학회와 국제경영학회(International Academy of Management)의 부사장으로 모두 일했고, 나중에는 국제경제학자연합의 부서를 이끌었다.5. 사망
파블로프는 2003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여 4월 2일 퍄트니츠코예 묘지(Pyatnitskoye Cemetery)에 매장되었다.[15][16]
6. 수상
- 노동적기훈장
- 명예 훈장
7. 기타
2000년, 빅토르 게라셴코의 지원을 받아 발렌틴 파블로프의 아들 세르게이 파블로프는 룩셈부르크의 동서 유나이티드 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했다.[17]
참조
[1]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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